콩과 돼지고기 (Pork and Beans)
피렌체의 첫 보름은 너무 정신없이 지나갔다. 독감(혹은 신종플루와 유사한 증상의 병)을 앓고 시차에 적응하고 에셀룽가(Esselunga)에서 장을 보고 나니 11월 9일이 되었다. 11월 9일부터는 Via Lingua에서 CTEFL이라는 영어강사 자격증 훈련을 시작했다. 1개월의 과정치고는 사실 가려운 등 긁을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쁘게 지내고 있다.
이탈리아, 특히 피렌체는 매우 이상한 곳이다. 3~4킬로미터 반경이내면 대부분의 것들이 존재하는 5백년 넘은 집을 빌려서 살아가는 사람들로 가득한 이 곳은 아름답고, 습도가 높고, 이탈리아어가 통하는 곳이다. 사실, 아직 이 곳이 어떤 곳인지는 모르겠다. 단지, 오랜만에 계속 영어로 이야기해서 녹초가 되었던 11월 9일 집으로 오는 길에 들었던 weezer의 콩과 돼지고기(Pork and beans)라는 노래가 생각이 났다. 날짜도 까먹고, 어떻게 하루가 가는 지도 모르는 이 곳에서는 가끔 에셀룽가라는 수퍼마켓에서 사는 육류나 치즈, 파스타나 감자 같은 것의 영수증이 내 생활을 더 잘 말해주는 지도 모르겠다고.
이따금 저녁이 되어서 감자의 껍질을 벗기다가 창밖을 바라보면, 핑크색과 푸른색을 곁들인 근사한 회색이 타들어가는 노을이 펼쳐지곤 한다. 학원에서도 가끔 그 장면을 바라보다가는 나는 르네상스 화가들은 뛰어난 상상력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아주 근사한 시력을 가졌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길가의 개똥을 피하고, 잘못 사면 우리돈으로 5천원 정도 하는 코카콜라를 골라들어도 이따금 폰테베끼오 다리 너머로 흐르는 아름다운 풍경은 사람의 넋을 잃게 만든다.
주인집의 무선 인터넷은 3개 회선밖에 제공되지 않아서 맥북프로로 신호를 나눠서 070 전화를 쓰곤 한다. 피렌체에서 성공적인 인터넷 전화를 하기까지는 상당한 인내심이 요구되기는 하지만, 그래도 뚝뚝 끊기는 말에 사람들은 안부를 전해듣고 안심은 하는 모양이다. 한국돈으로 삼천원만 내면 와인을 실컷 마실수도, 그 어디에서도 제대로 된 인터넷을 접속할 수 없을 수도 있는 피렌체는 이렇다할 애정도 이렇다할 증오도 생기지 않는 아주 이상한 곳이다. 교회 옆에 붙어, 몇 차례 수도원이었을지도 모른다는 5백여년이 된 집에서 각기 다르게 생긴 콘센트 모양을 비교해보면서 드는 생각은.
피렌체는 이상하게 사람을 붙잡아두는 매력이 있는 곳이다.
어느새부턴가 나는 이 도시에서 살던 사람이고, 한국에 대한 기억은 드문드문 살아나는 것 같다. 아직 길 이름을 외우지 못해서 방향감각에 최대한 의존해야 살아갈 수 있는 이 곳에서 변하지 않는, 하나도 똑같이 생긴 것이 없는 건물들을 보고 있으면 나 자신의 의식과 주변의 공기가 섞여서 경계가 없어져 버린 느낌마저 든다.
나는 이따금 내가 좋아하던 가족들과 친구들, 지인들의 이름을 하나씩 마음쏙으로 불러본다.
나는 잘 지내고 있어요.
그것 이외에는 정말 할 말이 없는 것 같다. 나는 비록 바쁘고, 비싼 물가와 높은 환율에 놀라기는 하지만 잘 지내고 있다고. 에셀룽가 같은 수퍼마켓에서 싼 값에 신선한 먹을거리를 사다 먹을 수 있어 건강해지는 느낌이 들 정도로 잘 지낸다고. 가끔 아름다운 저녁 노을을 보면 눈물이 날 정도로 잘 지내고 있다고. 매일 학원을 가는 길에는 잘 정돈된 루이비통과 보테가 베네타 매장을 무심하게 보면서도 기분이 괜시리 좋아진다고.
학원에서는 미국사람들과 영어로 대화를 하고, 집으로 가는 길에는 곳곳에서 들리는 이탈리아어에 무언의 미소로 대답을 하고, 집에 와서는 같이 사는 형과 맹렬하게 우리말로 이야기하다 보면 나는 가끔 내가 서 있는 지점의 좌표가 어떨지 매우 궁금해진다. Via Pierluigi da palestrina 39라는 피렌체의 주소를 구글맵으로 검색해보면, 주변의 사진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프라토라는 지역을 바라보는 프라토 알 프라토라는 관문이 있는 동네에 살고 있지만, 정작 내가 속한 곳은 이 지구위의 한 점이라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서울에서는 집이 있어도 매일 움직이지 않으면 안되는 피로감이 있었다면, 피렌체에서는 유유히 움직여도 나를 이동시켜 주는 흐름같은 것이 있는 것 같다.
내일이면 1대1 영어 강습 훈련이 시작된다. 나는 나타샤라는 아주머니에 대해 취조와 같은 질문을 하면서도 그녀가 동사 과거형과 현재 완료에 대해 잘 알고 있는지에 대해 메모를 해야할 것이다. 그리고 항상 네이티브 스피커가 하는 말을 최대한 가깝게 따라하기 위해 머리속에서 수 많은 에러 정정을 해야할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많은 스트레스와 피로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렌체는 나에게 어떤 이상한 힘을 불어넣어 주는 것 같다. 아직, 어떤 성당을 가보았는지, 미켈란젤로라는 곳이 언덕인지 확실하게 구별을 못한다. 열 문장 정도의 이탈리아어 이외에는 아직 공부하고 있지 않다.
아직도 그 이유를 확실히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피렌체로 온 것은 대체로 잘 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가끔은 학원에서 서쪽이라고 생각되는 방향을 바라본다. 그 시선의 끝에는 나를 걱정해 주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 기뻐진다. 다행히 아직 겨울이 오지 않은 이 곳에서는 이렇다할 슬픔도 외로움도 들지 않고 있다. 나는 잘 지내고 있다. 단지 아직은 조금 바쁘고 보고 들어야 할 것이 많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