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의 예를 드는 것은 어떻게 보면 재수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한국의 장애인이 생활하는 현실을 보면 아무래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보냈던 교환학생 시절을 떠올리게 된다.
휠체어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의 작은 도시인 헤이워드(Hayward)의 언덕에는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이스트 베이 캠퍼스가 위치하고 있다. 약 15분에 한 대 정도로 다니는 92번 버스는 이 학교와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을 연결하는 광역급행전철인 바트(Bart)를 연결하는 유일한 버스이다. 대게 이 버스를 타는 승객은 지역주민이라 정해져 있는 듯 했다.
- 92번 버스는 가끔 휠체어를 탄 승객이 타게 된다.
- 휠체어를 탄 승객이 타고 내리거나 할 때 버스는 일단 길에 정차하게 된다.
- 그리고 압력을 조절해 차체를 한쪽으로 기울게 된다.
- 버스기사는 이 때 차를 완전히 정차한 걸 확인하고 내려서 공구를 꺼낸다.
- 버스기사는 아주 친절하게 휠체어에 탄 승객에게 인사를 건넨다. 잘 지내냐는 말부터 옷이 예쁘다는 찬사까지…
- 남은 승객들은 창으로 전해져오는 캘리포니아의 따뜻한 햇살을 즐기고 있다.
- 버스 내부는 아주 조용하고 평화롭다. 낮술이 취해 약간 횡설수설하던 아저씨 승객까지 잠잠할 정도
- 버스 문이 열리면 휠체어가 타기 쉽게 계단이 내려오거나 플랫폼이 확장된다.
- 주변의 승객이 돕거나 기사가 직접 휠체어를 차 내부로 옮긴다.
- 장애인 전용 좌석에 안전하게 세운다.
- 전동 휠체어가 멈춘 것을 확인한다.
- 기사는 공구를 이용해 안전벨트까지 단단히 고정시킨다.
- 다시 버스는 균형을 잡고 출발한다.
승객들은 그렇게 먼 거리를 가거나 하지는 않는다. 92번 버스가 가장 멀리 가는 곳은 동네에 있는 큰 몰인 사우스랜드 몰이다. 대부분 공립 도서관 같은 곳에서 휠체어를 내리게 된다. 그리고 위의 설명과 같은 과정을 한번 더 겪게 된다.
아주 인상 깊었던 점은, 거의 모든 시설에 장애인을 위한 픽토그램이 있는 것 보다 더 인상 깊었던 점은, 저렇게 복잡한 장애인 탑승 과정 중에 아무도 화를 내거나 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다른 승객들은 차분히 기다렸고 운전 기사는 아주 즐겁게 기꺼이 휠체어 탑승을 돕는다. 그리고, 정류소를 지나가던 사람들은 아주 당연한듯이 돕게 된다. 평소에 25센트 동전이 있냐고 반 협박조로 어슬렁거리는 젊으이나, 술이 취해 고래 고래 소리 지르는 동네 아저씨할 것 없이 온순하게 돕는 모습을 보였다. 이건 문화적 충격을 넘어서 어떤 숭고한 의식을 목격하는 듯 했다.
청각장애 수업 보조
철학 수업을 하나 들었었다. 이 수업은 학생들이 거의 고향이나 유럽여행을 떠난 조용한 미국 대학의 여름 학기 교정에 토론을 격렬이 원하는 철학동호회 학생들이 교수와 함께 만든 수업이었다. 당연히 나는 준비가 되지 않아 항상 관찰만 하는 입장이었다. 가장 흥미로운 풍경은, 뒷자리에 앉았던 아주 나이가 많은 동양인 할아버지와 자원 봉사자의 풍경이었다. 그 분은 다른 수업에서도 몇 변 봤었는데, 알고 보니 귀가 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학교에서는 귀가 들리지 않는 학생을 위해 자원봉사 요원을 파견할 의무가 있기 때문에 수업에 함께 참여하도록 한 듯 했다. 랩탑과 속기용 키보드 등을 가지고 아주 빠른 속도로 수업 내용을 타이핑 하던 여성 자원봉사 요원은 수업 초반에 수업 내용을 확실히 받아쓰기 위해서 손을 들고 대화의 내용을 확인하고, 여러 사람의 토론이 한꺼번에 모이는 것을 자제하도록 부탁했다.
철학 수업이라면, 그런 요청에 흐름이 깨지게 된다. 학생들은 수업시간이 모자라서 쉬는 시간, 저녁에 피자와 맥주를 즐기는 시간까지 토론에 할애하는 열성적인 학생이었고, 그 열정에 보답하는 교수 또한 굉장히 많은 양의 대화를 소화했다. 하지만, 모두들 그러한 요청이 있은 후부터는 정확하게 발표하고, 분명한 발음으로 이야기하려고 노력하는 태도가 보였다.
그리고 그 다음 시간부터는 자원봉사자가 한명 더 늘었다. 교수의 말과 왼쪽 학생들 일부의 말을 쓰는 사람부터 나머지 학생들의 대화를 모두 타이핑 하는 자원봉사자가 는 것이다. 효율성 문제로 본다면, 청각장애인 학생이 한 명 있는데 두 명의 자원봉사자가 고가의 장비를 가지고 타이핑을 하고 스크립트를 매일 전달해 주는 것이 그다지 합리적인 일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 동양인 할아버지가 수업에 얼마나 열성적으로 참여할 지도 사실 검증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그 문제를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은 나 혼자밖에 없는 듯 했다. 그들은 제 멋대로 떠들고 토론하고 때로는 겪렬한 의견차를 내 보이면서도, 가장 뒤에서 빠르게 타이핑하는 자원봉사자들의 요구를 최대한 들어주고 있었다. 이 또한 신기한 것을 넘어서 어떤 숭고한 의식을 보는 듯 했다.
샌 프란시스코 같은 비교적 바쁜 도시였다면 어떤 상황이었을지 궁금하다. 하지만, 그 누구도 놀라거나 하지 않는 것으로 봐서 그리 특별한 풍경은 아닌 듯 했다.
물론, 위의 상황은 시간과 비용이 충분히 뒷받침되는 특수한 상황에서 가능하다고 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모든 것이 제도적으로 완벽히 뒷받침되어 돌아가고 있는 사회적 기능이며, 구성원들의 인식또한 그것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거나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확고하게 자리 잡은 듯 했다.
한 때 장애우*라는 부자연스러운 말까지 사용해가며, 우리는 관심을 필요로 하고 사랑을 보여야 한다는 캠페인을 접하게 된다. 하지만, 가끔 그런 관심이, 에스컬레이터를 계단 없이 놓거나 엘리베이터를 하나 더 놓는 등의 노력을 하지 않고, 매 순간 공익요원을 호출하고, 커다란 멜로디와 함께 모든 사람의 시선을 받는 장애인용 리프트를 운행하는 방법같은 걸 생각하는 한심함은 또 어떻게 할 것인가. 추락사고가 잦고 안정성이 의심되는 철저히 정상인을 위주로 한 디자인이다.
장애인의 날이 오고 관련 캠페인을 접할 때마다 항상 캘리포니아에서 경험한 두 사건이 떠오른다. 어느순간 장애인과 비장애인에 대한 별다른 자각이 없어지던 숭고한 의식과도 같던 순간들 말이다. 사회적 편견에 대한 동정심보다는 모두를 위한 접근성이 좋은 디자인에 대한 제도개선이 시급함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 장애우라는 단어에 대해
누리꾼이나 누리집 처럼 단어의 기원과 사회적으로 어떤 현상을 일으켰나 등에 대한 심각한 생각없이 그냥 죄책감을 면하기 위해 바꿔 쓰자고 주장하는 단어들이 있다. 장애우야 말로 대표적인 예가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장애인을 병신이라는 비하하는 말로 써써는 절대 안되겠지만, 그렇다고 장애우라는 이상한 말을 만들어낼 것 까지는 없다고 본다. 만일 장애인이라는 말이 그렇게 마음에 걸린다면 장애라는 말을 다른 개념으로 대체해야지 무작정 ‘친구’에 해당하는 ‘우’를 붙이는 건 또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장애인이라고 꼭 우리의 친구가 되어야 하나, 친구가 되기 싫어한다면 어떻게 하란 말인가. 영어권에서는 ‘handicapped’에서 ‘disabled’, ‘challengeable’등의 단어를 이용해 결핍이 아닌 선택의 문제로 바꾸려는 노력을 해왔다. 그렇다고 이것이 바람직하다고는 볼 수 없지만 어느 정도는 합당한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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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우라는 단어 때문에 여러 장애인 관련 자료를 검색해서 보게 되었다. 휠체어의 비용문제에서 대중교통 이용문제, 장애인 대상의 성폭력까지 다양한 문제들이 생존권을 위협하는 사례가 아직도 많은 것 같다. 장애인의 관심을 촉구하는 캠페인으로 싸게 때우려 하지 말고, 사회전체적으로 모두의 안전과 생존권을 높이기 위한 기준에 장애인의 기준을 포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장애인에게 안전하고 편한 제도라면 모두에게 안전하고 편할 것이라는 ‘유니버설 디자인’적인 철학이 이럴때 매우 유용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