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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y 2009

어쩌면 광장의 외침을 닮아 있을 지 모를 트위터

트위터는 샌 프란시스코의 브라이언트 거리쪽에서 시작된 웹 서비스로, 인터넷의 SMS로 불리며 최근 엄청난 인기를 보이고 있다. 샌 프란시스코의 남서쪽에 있는 브라이언트 거리는 작년에 교환학생 때 잠시 지나간 적이 있었다. 샌 프란시스코로 놀러갈 때는 한국학생들 모르게 몰래 광역전철을 타고 다녀서, 낮에 햇빛이 포근하게 내리쬐는 기분을 혼자 만끽하며 거리를 걷곤 했다. 에너지FM이란 라디오 방송국의 한정판 티셔츠를 사러 걸어가던 그 때, 베스트 바이가 있던, endup이라는 클럽과도 가까이 있었을 법한 브라이언트 거리 한켠에서는 트위터의 서비스가 분주하게 이루어지고 있었을 것이다.
아직까지 트위터는 리서치 단계라고 한다. 어떻게 돈을 벌 지도 모를 이 서비스는 현재 인터넷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서비스가 되었다. 나는 트위터를 생각하면, 아름답고 포근한 샌 프란시스코의 풍경이 떠 오른다. 그곳은 겉으로만 봐서는 최첨단과는 거리가 먼 고풍스러운 분위기와, 최신 애플 제품의 발표를 듣기 위해 전세계에서 사람들이 몰려드는 굉장하 컬러풀한 분위기가 섞이는 독특한 곳이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트위터라는 서비스는 탄생한 것이다.


지금 한국에서 갑작스럽게 트위터에 관심이 몰리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최근 한국의 인터넷은 발전하는 인프라에 걸맞지 않는 규제와 상업주의로 인한 폐해가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인터넷은 가치를 빛내기도 전에 가입자 유치 리베이트 이십만원의 수단으로 전락해 버렸을 지도 모른다. 트위터가 묻는 것은 아이디와 비밀번호 정도이다. 그 후에 트위터를 즐기기 위해서는, 심지어 트위터 홈페이지(twitter.com)에 접속하지 않고도 가능하다.

트위터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서비스는 아주 단순하다. 어쩔때는 에러 메시지를 그냥 토해내기도 한다. 트위터에는 사진을 올리는 공간도 없고, 댓글을 정리해주는 방식도 없다. 모든 것은 그냥 140자 짜리 한줄의 글로 나열된다. 시간의 순서로 나열되는 글에는 @트위터아이디 하는 식으로 누구와 관계되었다는 간단한 식별자와 #키워드 라는 단순한 그룹화가 있다. 검색 기능도 없던 것을 최근에 어떤 회사를 인수하면서 가능하게 했다고 한다.

트위터의 커뮤니케이션은 '광장에서 외치는 것과 같다'라고 하는 말이 있다. SMS로 보내듯, 어딘가로 생각과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보내면, 하늘에 구름처럼 둥실 떠오르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의 구름들은 서로 뭉치거나 흩어지거나, 길게 이어지거나 한다. 물론, 화창한 날씨처럼 구름이 아예 보이지 않을 때도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기분좋게 낮잠을 자거나, 밥을 먹고, 트위터는 잠시 쉬고 있을 것이다.

나는 트위터 서비스가 한국에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걸 환영하고, 더 활발한 활동이 있었으면 한다. 한국에서는 한 동안 광장의 문화가 없었다. 공개된 장소에서의 집단적인 행동이란 '시위'라는 인식이 있었고, 2002년 월드컵 응원을 계기로 찾았던 듯한 광장은, 다시금 규제와 법규로 인해 없어졌다. 대신, 그 곳에는 랜드마크라 불리는 구조물들이 들어서고 있다. 어디에도 개방적인 공기는 찾기가 힘들다.

트위터의 이야기는 그렇게 우리가 광장에서 소리치는 이야기들을 모은 것과 같다. 따른다(Follow)는 개념은 너와 내가 서로 손을 맞잡아도 되고, 아니면 내가 너를 향해서만 소리 쳐도 된다. 그 어떤 활동에도 제약은 없다. 여기 저기서 어제 먹은 저녁이야기를 하다가도, 누군가 서거하신 전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를 크게 외쳐도 된다.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몰려들 것이고, 그 상황이 못마땅한 사람은 광장의 다른 한 켠으로 움직일 것이다. 트위터가 다른 점은 이러한 생각들이 의미를 지닌 텍스트로 쌓인다는 것일 것이다.

블로그의 엔트리로 대표되는 퍼머링크를 가진 하나의 글과 카페나 커뮤니티에 올라가거나, 쪽지와 이메일로 주고 받은 커뮤니케이션은 누군가를 향한 경우가 많다. 글을 쓰는 행위를 열고, 닫는 동안 일정한 형식에 의해 이야기가 생성된다. 그리고 이러한 커뮤니케이션을 위해서는 구축하고 신경써야 할 시스템이 있다.

트위터는 그런 면에서 아주 자유로운 매체이다. 그냥 일단 쓰기 시작하면, 자연스럽게 이야기들이 쌓여 간다. 비록 그것이 아주 짧은 140자의 글이라도 좋다. 더 긴 내용은 어딘가에다 쓰거나, 누군가의 링크를 가져다가 7자 이내의 링크 축소 서비스(Tiny URL같은)로 줄여서 덧붙이면 된다. 굳이 트위터가 아니라도, 하이퍼링크를 통해 무한대의 것들을 광장으로 들고 나올수가 있다.

실제로 트위터의 API 목록을 보면 무한대로 서비스가 확장이 가능하다. (참고 : 윈도용 트위터 앱 목록 http://twitter.pbworks.com/WindowsApps, 맥용 http://twitter.pbworks.com/MacApps) 특히, 어플리케이션과 웹, 웹 어플리케이션 간의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다양한 서비스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트위터의 고향인 샌 프란시스코는 지역내 교통정보를 트위터를 이용해 중계하고 있다.

트위터는 중심이 어디인지 알 수가 없다. 무심코 들리는 새들의 지저귐처럼 그냥 거기에 있을 뿐이다. 그것은 무게도 없고 형체도 없는 외침에 불과할 지 모른다. 하지만, 웹은 그런 외침의 의미를 찾아내어 하나의 거대한 흐름을 만들어냈다. 트위터는 링크와 구글의 세계로만 존재하던 인터넷에 광활한 광장이라는 가능성을 열어준 셈이다.

*미투데이와 플레이톡을 써 본 경험으로는 이 두 서비스는 사용자간의 관계를 더욱 중시한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둘 다 '댓글'이라는 상호 커뮤니케이션을 중요시하는 형태로 되어 있어요. 그리고 가입과 지인 네트워크가 중요하게 작용하구요. 반면에 트위터는 지금 생각하고 말하고자 하는 것을 그냥 계속해서 보여주는 역할에 충실합니다.

*플레이톡과 미투데이는 트위터와 유사하지만, 트위터 만큼의 파급력을 가져올 지는 미지수 입니다. 둘 다 폐쇄적인 특징이 있고, 특히 미투데이는 네이버에서 인수함으로서 싸이월드화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요. 토씨(Tossi)의 경우 마이크로블로깅으로 시작하여, 최근에는 텀블로그같은 중간 길이의 블로깅에 위치 기반의 서비스를 합친듯한 느낌이 듭니다. 토씨는 너무 통신사와 결합되어 있어서 큰 서비스로 될 지도 미지수이구요. 왜 SKT는 싸이월드에 토씨를 합치지 않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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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디 평안히

*새로 시행되는 저작권법 때문에 원래 있던 사진을 삭제합니다. 안타깝습니다.

나에게 정치라는 문제와 계급이라는 문제에 대한 의식이 생긴 건 정말 얼마 되지 않았다. 나는 미국에서 교환학생을 하고 있었고, 헤이워드라는 작은 도시의 공공도서관에서 뉴욕타임즈의 1면을 장식한 촛불시위행렬의 모습을 보면서 가슴속에서 조그마한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던 것 같다.
나는 그 전까지 어떤것에 대해서도 섣부른 판단을 내리고자 하지 않았다. 나는 겁이 많았고, 아는 것은 너무나도 적은 어린아이 같은 심정이었다. 나는 나의 판단조차 믿을 수 없어 무엇이 옳고 그름을 잘 알지 못했다. 어쩌면 나는 사상적으로 과잉보호아래 성장한 온실속의 화초 였는지도 모른다. 나는 부조리한 대우는 마르크스가 세운 정교한 사회 시스템에서 생기는 단순한 에러라고 생각했다. 매우 어리석었다. 그러한 시스템은 기계처럼 계획한 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단지, 어떤 힘에 의해 불순한 의도로 움직이고 있었을 뿐이다. 그런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는, 분노와 공포 앞에 체념하고만 있었다.

나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의 태도가 싫었었다. 그의 정치 방향의 대부분은 혁신을 향한 획기적인 것이었지만, 언제나 단호하게 호통치는 경상도 사투리의 어투가 맘에 들지 않았다. 그는 나에게 경상도 출신의 가부장적인 단호한 말투를 지닌, 내가 싫어하는 어른상과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래서 그가 어떤 말을 하든지 간에, 내가 어릴적부터 배신감을 느끼던 고향의 '꼰대'들을 무의식중에 떠올린 것 같다. 경상도 사투리는 정감 있는 말투가 아니다. 일말의 여지도 허용하지 않는 완고한 말투이다. 따뜻하고 배려 섞인 말은 하나도 있지 않은 건조한 말투의 대통령을 나는 이유도 모른채 싫어하고 있었다. 아직도 그가 어떤 일을 하려 했는지 잘 모른다. 단지, 그가 세상을 바꾸고자 했던 대부분의 이야기는 공감이 갔지만, 말투에서 느껴지는 이질감 때문에 외면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오늘 한겨레21의 표지를 말없이 바라보고는, 전철 키오스크에서 집게에 걸린 하나남은 잡지를 사 들고 왔다. 한겨레21은 유난히 조용했고, 그 안에는 흑백의 미소로 손을 흔드는 전 대통령의 사진이 실려있었다. 문득, 그 사람이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나서 봉하마을로 내려갔던 때가 생각이 났다. 텔레비전 카메라 앞에서 주민들을 앞에 두고 전 대통령은 아주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기쁜 마음으로, 감정에 벅차올라 말하는 걸 텔레비전에서는 처음 봤던 것 같다. 모든 짐을 내려 놓았다고, 지금 이 순간이 그 어느때보다 기쁘다고 말하는 그는 얼굴은 환히 웃고 있었고, 눈에서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흐를것 같은 긴장이 서려있었다. '그럼 이 때까지 대통령하는 동안은 어떤 느낌이었다는 거야.'라는 심드렁한 말투로 그 장면을 지켜보면서,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졌다. 목소리는 그 어느때보다 격양되어 있었고, 마이크를 타고 나에게까지 그 기쁨이 전달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 대통령은 많은 노력을 했던 것 같다. 지금까지 '한국은 이래서 안된다'라는 나쁜 가치관과 싸우기 위해 많은 일들을 했다. 물론, 대의를 위해 희생해야 한다고 손을 놓아버린 부분도 많다. 그리고, 자신의 변혁 이후를 생각하지 못해 미래를 충분히 준비하지 못한 실수도 있다. 하지만, 전 대통령의 시도는 그 동안 우리가 어떤 잘못된 가치관에 따라 살고 있었다는 걸 일깨워 주기엔 충분했던 것 같다.

산을 올라가면서 그가 느꼈을 절망은 얼마나 컸을까. 항상 집 뒤에 있던 그 바위 위에서 서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과연 어디서부터 잘못되었고,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없는지에 대해서 충분히 생각해보지는 않았을까. 한 나라의 대통령을 했고, 변호사 출신으로 민주화를 위해 싸워온 사람이라면, 그 누구보다 많은 데이터를 가지고 상황을 바라보려 했을지 모른다. 그를 그 바위위에서 떨어지도록 만든 것은 그가 결코 머리가 나빠서도, 충동적이어서도 아니었을 것이다. 단지, 그것 이외에은 어떤 선택도 할 수 없게끔 만든 무언가가 있어였을 것이다.

하루 아침에 바뀔리는 없겠지만, 이번 한겨레21을 사 들면서, 좀 더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가끔 한겨레21도 사서 보고, 새로 발행된 르몽드 디플로마띠끄도 보면서, 인터넷 뉴스의 자극적인 제목과는 좀 다른 시선을 경험해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우리가 네이버와 다음의 뉴스 섹션을 포기하면, 좀 더 다른 세상이 보인다. 8자가 채 되지 않는 포털의 주소 너머에는 읽어야 할 책들도 들어야 할 사람들의 말도 많이 있다. 단지, 모니터 너머와 매일 오가는 출퇴근 버스 안의 상황 말고도 세상에는 기뻐하는 것과 고통받는 것이 있다. 아주 오래전부터 세심하게 관찰해 책을 낸 학자들의 이야기도 있다.

그 분이 남긴 유서는 아주 짧은 것이었다고 한다. 남은 사람들에게 하는 설명치고는 너무나 적은 말을 남기고 떠나셨다. 어쩌면, 해답을 우리가 찾아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 분이 그 바위에서 뛰어내렸어야 하는 이유를 우리는 찾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끓어오르는 분노도, 북받쳐오르는 슬픔도 모두 우리가 제대로 알아야 할 것들을 향해 써야 할 것이다. 부디 평안히. 남은 사람들은 열심히 공부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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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이틀전에 이모님중 한 분이 돌아가셨다. 사실, 몇년간 찾아뵙지 못해서 갑작스러운 소식에 나는 놀랐지만, 엄마의 전화 목소리는 굉장히 담담했다. 엄마는 형제자매중에 어린편에 속하신다. 최근 몇 년간 나이가 많은 이모분들과 고생하며 돈을 벌다가 암으로 돌아가신 엄마의 동생인 외삼촌이 돌아가셨다. 한 집에서 자라던 형제 자매들이 곁을 떠나는 모습을 보는 엄마의 심정은 어땠을까. 아직까지도 슬픔이란 것이 죽음이라는 어쩔 수 없는 현상에 대해 담대해지지 못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어제 형과 제일 막내 이모와 차를 타고 내려 가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막내 이모는 돌아가신 대구 이모가 나오는 꿈에 대해 이야기를 해 주었다. 누군가가 관과 옷을 고르라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방 안에 가득 찬 관과 옷 사이에서 대구 이모는 아주 곱고 예쁜 감촉이 좋은 한복을 고르셨고, 막내 이모는 수의 옷감이 너무 안 좋은 것이라 입지 않는다고 던져 버렸다고 한다. 대구 이모는 곱게 차려 입으시고는 친정갔다 온다고 막내 이모에게는 나중에 오라고 대문 밖을 나서셨다고 한다. 막내 이모는 꿈에서 깨어 절에 가려고 했지만, 비가 너무 많이 내려서 못 갔었다고 한다. 그리고 어제 우리는 차를 타고 어두운 고속도로를 달려 대구로 향했다.

10년만에 보는 이종사촌들의 얼굴을 잠시 보고, 식사를 하던 상주가 놀래서 급히 우리를 맞아 곡소리를 했다. 장례식장은 다행히, 육게장 냄새와 소주 냄새, 분주한 대화가 오고 가고 있는 평범한 장례식장의 모습이었다. 나는 손을 다쳐 붕대를 감고 갔었는데, 친척 어른들과 형누나들에게 괜찮다고 말을 했다. 바쁜 와중에 내다 주신 밥은 맛이 있다기 보다는 그냥 앞에 있어서 먹는다는 느낌이었다. 장거리를 운전한다고 일미와 땅콩등을 챙겨 주셨다. 한 시간도 채 앉아있지 못하고 엄마가 울산 가시는 막차를 타셔야 해서 모두들 나섰다. 막내 이모는 이사한 울산 집에 간다고 같이 따라나섰다. 엄마와 막내 이모는 나이로 치면 엄마뻘이 되는 대구 이모의 죽음에 대한 기억과 요즘 사는 이야기를 하시느라 울산으로 같이 향했다. 울산행 고속버스가 이미 떠나버려서, 동대구역에서 새벽 2시 무궁화 티켓을 끊어 드리고는 형과 나는 경부선으로 올랐다.

졸음이 몰려와서 땅콩과 초콜릿을 계속 씹으면서, 밤공기처럼 서늘하게 뺨에 와 닿는 생활속에서의 죽음에 대해 생각을 해봤다. 나에게 죽음이란 것이 가장 가깝게 다가오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 때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부터가 아닌가 생각한다. 엄마는 전화를 침착하게 받고, '빨리 갈게'라는 대답을 하고, 싱크대로 가서 설겆이를 계속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조금 있다 터지는 울음 소리가 났다. 뜨거운 물이 쏟아져 내리고, 엄마는 계속해서 울고 있었다. 그 동안 엄마에게도 엄마가 있다는 사실을, 엄마에게도 그 어떤 것보다 슬픈 일이 있음을 몰랐던 나는 불안한 눈으로 거실 소파에 앉아있다가 같이 울음을 터뜨렸던 것 같다.

외삼촌이 돌아가시기 직전, 엄마는 아무래도 예감이 좋지 않다는 말을 하고 아침 비행기로 서울로 왔다. 나는 외삼촌이 아산병원에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엄마가 갑자기 올라온다는 말에 잠실로 향했다. 첫 비행기를 탄 엄마는 공항버스를 타고 잠실로 오셨다. 외삼촌은 이미 우리를 알아 보지 못하고 혼수상태에 빠져있었고, 엄마는 미련하게 고생만 했다고 외삼촌의 손만 쓰다 듬었다. 고향인 창녕으로 내려가는 구급차에 탈 자리가 없는 엄마를 남부터미널에서 버스에 태워 보내 드렸다. 엄마는 다음날 새벽 외삼촌이 돌아가셨다고 빗소리나는 전화로 이야기했다. 그 때도 형과 나는 차를 타고 창녕까지 내력갔었다.

외삼촌 이전에도 가장 나이가 많고, 다리가 불편했던 이모님이 돌아가셨었다. 엄마는 그럴 때마다 슬픔을 겪었을 것이지만, 삶이라는 과정 앞에 있는 죽음을 담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만 야속하게 받아들여야 했을 것이다. 한 때 같이 살아왔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떠나가는 모습은 남은 사람에게 많은 짐이 될 것이다. 엄마는 이번에도 누구보다 먼저 달려오시는 큰외삼촌과 함께 많은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 아들들이 온다는 말에 또 대구까지 오셨을 것이다. 엄마는 언니의 죽음 앞에서, 옆의 가족들을 따뜻하게 보듬는 것으로 할 일을 다하셨다. 동생인 막내 이모와 막내 이모의 늦둥이 딸과 함께 야간 무궁화 열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셨다. 사촌동생의 재롱을 보고 아침밥을 같이 먹고, 커피 한잔을 하고 서울행 버스를 태워 주러 터미널로 향했을 것이다.

죽음은 항상 갑작스럽고, 그 다음의 일을 어찌해야 될 지 모르겠다는 부담을 안겨 준다. 삶아 있는 동안의 의미가 죽음과 함께 과거의 것으로 빛이 바래기 시작할 것이다. 사람들은 죽음 이후의 상태를 모르기 때문에, 두려워하거나 받아들이거나 하는 자신만의 선택을 한다. 나의 경우에는 아직도 죽음이라는 의미에 대해서는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그만큼 철이 덜 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럴 때마다 죽음은 삶과 대척점이 아닌, 삶과 하나의 고리위에 있다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이 생각난다. 누군가의 죽음은 언제나 다른 사람의 가슴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과 고통으로 남는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대처 방법을 가르쳐 주는 이는 아무도 없다. 모두들 그렇게 조금씩 마음 속에 상처를 하나씩 내면서 살아가고 있다.

나는 비록 몇년 동안 인사도 못 드렸지만, 대구 이모님의 죽음 이후가 어떻게든 좋았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막내 이모의 꿈처럼 고운 옷을 차려 입고 친정에 가서 못 다한 이야기도 나누고 맛있는 것도 드시면서. 대구 이모의 임종 소식과 함께 배우 여운계씨의 타계 소식이 있었고, 새벽에 잠들었다 깨어났더니 전 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소식도 있었다. 이제부터 죽은 사람들의 삶은 남아있는 사람들의 몫이 되었다. 부디 죽음이라는 고통스런 단계 이후에는 좀 더 다른 의미의 단계가 있었으면 하는 기원을 해 본다. 나쁘고 안 좋은 것은 남아있는 사람들의 몫이다. 모두들 오랜만에 만난 이들과 맛난 음식을 먹고 이야기하는 풍경을 떠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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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네트워크를)하고 있습니까?

미리 말하자면 나는 그리 소셜한 사람은 아니다. 전화번호를 외울 수 있는 몇명 빼고는 한 달에 한 번 메신저에서 말한 번 할까 말까한다. 싸이월드도 제대로 안하고, 내 블로그의 관심블로거들이나 댓글 달아주시는 분들 블로그도 자주 들어가지 못한다.(이 자리를 빌어 죄송합니다)

인터넷은 처음에 자유롭게 뭔가 표현하는 곳이었다가 이제는 그러한 것이 아닌 자유롭게 뭔가에 대해 이야기하는 곳이 되었다. 트위터는 그 중심에서 때로는 '실체가 없는' 그 무엇에 대한 대화만 가득할 정도의 즉흥적인 네트워크가 되었다. 그렇다고 트위터가 나쁘다고? 전혀 아니다. 트위터같은 소셜 네트워크는 어쩌면 웹이라는 공간이 주지 못했던 즉흥적인 '리얼타임의 세계'를 훌륭하게 기록하는 매체로 길이 남을지 모른다. 트위터가 아니었다면 누군가의 메신저 대화함에서 삭제되고, 휴대폰 번호이동을 위해 누르는 초기화 버튼과 함께 영영 허공으로 사라져 버릴 지 모를 대화들이 맑은 날 솜사탕 같은 구름 위에(cloud)하나 둘씩 걸려 있기 때문이다.

트위터 모델이 미국에서 인기몰이를 하는 이유는 애쉬턴 쿠쳐나 오프라 윈프리, 버락 오바마 대통령 같은 유명인사의 파워도 있겠지만, SMS로 나누는 대화를 가장 효과적으로 웹으로 옮긴 사례라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 파급력은 개인간의 대화를 넘어서, 뉴스속보의 기능을 대체할 만큼의 생동감을 자랑하고 있다.

얼마간 미투데이트위터를 번갈아가며 써 본 결과. 트위터로 마음을 굳히기로 했다. 미투데이는 미투데이 안에서 너무나 많은 것을 담으려고 하고, 트위터는 자체에 이렇다할 기능이 없다는 차이가 있다. 그리고 트위터는 전세계를 겨냥한 서비스이기 때문에 좀 더 자유로운 확장이 가능할 것 같다. 한국 인터넷에서는 아마 미투데이가 더 매력적인 서비스일 것이다. 기존 네이트온이나 싸이월드의 인맥관리와 유사한 점이 많기 때문이다. 완전한 양방향이 부담스러운 나에게는 트위터의 Follow라는 개념이 좀 더 어울리는 듯 하다. 구글도 블로거닷컴 서비스에서 RSS구독을 Follow라는 개념으로 대체한다고 한다.

처음에는 우리나라 핸드폰에서도 가능한 미투데이를 써보긴 했지만, 오늘 접속해보니 네이트 초기화면에서 간단히 m.twitter.com만 입력해서 들어가도 괜찮은 수준의 모바일 페이지를 쓸 수 있었다. 미투데이의 경우 왠지 사용이 어렵게 되어 있다. 아마 모바일앱 시장에서는 간결하고 디자인이 눈에 확 뜨이는 형식이 더 인기를 끌 것 같다. 한국에서는 아무래도 네이버가 미투데이를 모바일앱으로 들고 나와서 인기를 끌지 않을까 한다.

트위터를 하나 열고, 인맥 네트워크인 Followers도 그렇게 많지 않은 상황에서 소셜네트워크에 동참했다고 말하기가 쑥쓰럽지만, 트위터의 재잘거림에 Follow하기로 했다. 머리속에서 휘발하는 생각의 가닥을 얼마만큼은 흔적을 남길 수가 있을 것 같기도 하고.

* 국내에서는 플레이톡, 미투데이, 토씨 등의 서비스가 있다. 이 세 서비스는 비슷한 시기에 나왔지만, 여러 모로 미투데이가 가장 돋보이는 써비스가 아닐까 한다. 하지만, 미투데이는 블로그라는 미디어를 '블로고스피어'라는 폐쇄적인 '그들만의 공간'으로 닫아버린 한국 웹의 병폐를 그대로 안고 가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다. 네이버가 인수해서 더더욱 그런 걱정이 든다.

* SK텔레콤과 SK커뮤니케이션즈라는 이상한 조직은 트위터같은 미디어가 발달했으면 진작에 컸을 우리 나라의 커뮤니케이션 스타일을 변질시킨 혐의가 매우 짙다. 만일에 사람들끼리 주고 받는 SMS와 네이트온의 메시지를 대화형태로 게시할 수 있는(그러니까 트위터!) 형태의 네트워크를 기획했고, 그걸 싸이월드에다 붙이려는 노력을 했다면 아마 세계적인 SNS모델이 탄생했을 것이다. 부가서비스 항목 만들기에만 고민한 그 두 회사는. 토씨라는 난데없는 마이크로블로깅을 만들어내었고, 자사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개의 블로그 서비스와 미니홈피 써비스와 인스턴트 메시징 서비스와 통합조차 못하고 있다. 아마 누구 말마따나 우린 안될것이다.

* 트위터를 국내에서 가장 활발하게 서비스할 것 같은 회사는... 바로 다음이다. 네이버는 미투데이를 인수했고, SK컴즈는 논외이고, 파란은 아무래도 플레이톡을 선택할런지도 모른다. 다음은 최근 트렌드를 '개방'으로 잡은 만큼 트위터의 한국어 판이나, 트위터와 티스토리의 결합, 트위터 모바일 어플리케이션 등에 진출할 가능성을 있을 듯.

*트위터에 들어가지 않고, 트위터에 포스팅하는 방법은 아주 무궁무진하다. Ping.Fm같은 서비스를 이용하면, 단 한번의 포스팅으로 수 많은 2.0 사이트들로 메시지를 보낼 수도 있다. Twittermail같은 걸로는 우리나라 휴대폰에서도 사진 포스팅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국내에서는 SMS/MMS to Email로 포스팅이 안된다. 좀 더 연구가 필요할 듯. 특히 Ping.Fm은 메신저용 봇도 제공하기 때문에 정말 입맛대로 골라 쓸 수 있을 정도이다. 그리고 블로그에 달 수 있는 위젯도 배포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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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쥐 Thirst

*스포일러 안내
아래에 해당하는 분은 읽지 마시길 바랍니다.
  • 원작인 "테레즈 라캥"과 "박쥐"를 읽을 생각이 있다.
  • 원작인 "테레즈 라캥"만 읽을 것이다.
  • "박쥐"를 보지 않을 것이다.
  • 박찬욱 감독은 "박쥐"에서 대중적으로 실패햇으므로 다음 영화에서는 좀 더 고려해야 한다.
*스테판's Movie Story에서는 박찬욱 감독의 인터뷰를 잘 정리해 두어서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블로거분께 다시금 감사드립니다.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꼭 읽어보셨으면 합니다.
박찬욱 감독과의 "박쥐" 특별상영회 후기

혹시나, 글이 잘 안 써지는 이유는 많은 것을 놓친것이라는 생각을 해서

박쥐를 한번 더 보았다.
금요일에 집에 내려가는 차편이 심야에나 있다는 말을 듣고, 바로 강변 CGV에서 시간을 1분 1초를 맞춰가며 다시 본 것이다. 어쩔 수 없이 토막 토막 쓸 수 밖에 없다. 박쥐라는 영화에 대해 쓰려면, 몇 페이지라도 할애를 해야할 지도 모르고, 단 한 줄도 쓸 수 없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박찬욱의 다른 작품들과는...

박쥐를 이야기하려면, 올드보이와 친절한 금자씨를 이야기하기 보다는 복수는 나의 것과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를 이야기하는 게 나을 것이다. 여러 면에서 박쥐는 두 영화와 닮아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박찬욱은 대중들에게 그리 친절한 편은 못될 것이다. 대중이 기호라는 경계를 친 채 극장에 들어왔을 때, 그 경계를 깨주는 것이 영화 감독의 역할이라는 생각을 한다. 박쥐에서는 여러 면에서 그런 경계를 깨 주는 아주 좋은 영화이다.

원작 "테레즈 라캥"

이 영화는 에밀 졸라의 "테레즈 라캥"을 느슨하게 원작으로 삼고 있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이야기의 구조적인 면과 캐릭터 같은 설정은 그대로 사용했다. 라캥 부인는 라(나)여사로 테레즈가 태주가 되고, 까미유가 강우가 된다. 목요일의 모임은 수요일로 옮겼고, 철도 사무소는 '물'이라는 테마를 강조하기 위해 댐으로 옮겨졌다. 그 외의 인물들은 이름이 바뀌었고 역할도 미묘하게 바뀌었다. 특히, 상현은 앞으로 해도 상현 뒤로 해도 상현인 현상현이 되었는데, 이는 기본 틀에서 변화를 주는 새로운 캐릭터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박찬욱 감독도 비슷한 생각을 한 것 같다. 테레즈 라캥에서는 욕망과 죄의식에 대한 심리 묘사가 아주 치밀하게 되어 있다. 사실, "박쥐"에서는 장면 위주로 설명을 해 나가는데, 그런 장면을 보고 있으면 테레즈 라캥의 대목들이 빈틈을 메우는 신기한 느낌도 들었다.

섹스

이 영화에서는 섹스가 굉장히 자주 등장한다. 실제 섹스의 행위는 삽입보다는 액체의 교환에 더 중점을 둔 것 같다. 이 영화에서 가장 도발적인 장면은 상현이 태주의 발가락을 입에 넣고, 태주가 상현의 손가락을 입에 넣는 장면일 것이다. 뭉뚝하고 끈적하게 때리는 소리로서 표현하는 이 장면은 그 다음의 상현이 태주를 깨무는 장면으로 이어지고, '다른 여자들도 이래요?'하는 태주의 첫경험을 암시하는 듣한 대화로 이어진다. 나중에 상현이 호각소녀를 강간하려다가 축 늘어진 성기를 노출하는 장면에서는 섹스라는 것이 끝이 난다. 상현에게 남은 마지막 쾌락은 그렇게 끝이 난다. 사제에서 힘이 빠진 몇 센치의 존재로 전락한 그의 등 뒤로 돌이 던져지는 장면은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상현의 도덕성에 대한 것이긴 하지만 그것에 대해 심판하지 않겠다는 것으로 보인다.

액체

영어 제목인 Thirst가 말해주듯, 이 영화에서 액체는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민망할 정도로 액체에 대한 사운드는 강조된다. 피와 땀, 물침대, 오아시스, 댐, 수요일, 술 등 영화 곳곳에서 액체가 소품으로 쓰인다. 특히, 엠마뉴엘 수도원에서도 아주 건조한 벽을 보여준다. 여기서도 피를 토하는 행위는 그렇게 습하게 그려지지는 않는다. 피의 맛을 보고 쾌락을 본격적으로 갈구하기 시작하면서, 액체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때부터 물은 강우와 라여사로 대표되는 죄의식과 금기를, 피는 쾌락을 의미하는 듯 등장한다. 특히, 이 영화에서는 뭔가 마시는 소리를 거북스러울 정도로 크게 표현한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거대한 바다위에서 건조하게 타 죽는 것으로 끝이 난다.


상현은 왜

상현이라는 신부의 "당근이죠."라는 말로 시작하는 이 영화는 순교를 위시한 자살행위를 하러 간 상현이 뱀파이어 바이러스가 든 걸로 추정되는 피를 수혈받게 된다. 이전까지는 남을 위해서 살아 오던(온다고 생각하던) 상현은 그 순간부터 "모든 쾌락을 갈구"하게 된다.
'기억은 하나님의 장기이다'
'살이 썩어가는 나환자처럼 모두가 저를 피하게 하시고, 사지가 절단된 환자와 같이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게 하시고...'
'제 기도는 잘 듣습니다.'
는 아마 우리가 쉽사리 이해하지 못할 상현의 행동들을 설명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종교라는 옷을 입었지만 이성으로 합리화할 수 없는 인간의 특성을 상현은 너무나도 쉽게 뛰어넘을 수 있다고 믿었던 건지도 모른다. 십계명이 금지한 것들을 어기고 자신의 쾌락을 쫓는 상현은 항변하듯 "수혈하는 피를 제가 고른 건 아니지 않습니까."라고 대답한다. 처음부터 이 영화는 사제의 순교에 대한 영화가 아니었다. 어떠한 상황에 처한 사람이 뱀파이어가 되고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는 영화이다. 갈수록 이 영화의 이야기는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의 "존재의 이유는..."의 문장을 완성하는 것과 같다.

박찬욱의 박쥐

이 영화에 대해 좋다 나쁘다는 감상을 말하자면, 나는 굉장히 좋아한다고 말할 것이다. 감독의 의도는 자세히 모르겠지만 생각할 거리가 풍부한 텍스트이기 때문이다. 박쥐란 영화는 박찬욱으로서 더 이상 올드보이의 수상이나 친절한 금자씨의 이영애에 대한 변주를 벗어날 수 있는 전환점 같은 영화같다. 영화 이외의 것들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워진 박찬욱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었던 것 같다. 이 영화를 보다 더 잘 이해하려면 박찬욱의 전작들을 한번 더 챙겨보고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를 다시 한 번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아마 그러면 감독이 이야기하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을 것이다.

박찬욱에 대한 변명

예전에 학교 영문학 수업 시간에 비평으로 유명한 교수님이 올드 보이에 대한 혹평을 내리시는 것을 듣게 되었다. 어떻게 그렇게 품위 없고 잔인한 화면을 한국의 대표적 영화라고 할 수 있느냐고 화를 내시는 것이었다. 한국의 문화가 세계적으로 뻗어나가겠다는 것에 불만은 없지만, 좋은 것만 보여야 한다는 그분의 생각에 소름이 끼칠 정도로 배신감을 느끼던 때가 생각이 난다. 나는 좋지 않은 영화보다 더 안 좋은 습관이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자신있게 나누는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영화가 불쾌감을 조장할수도 있고, 시대의 윤리를 거스를수도 있지만, 어쩌면 그러한 것들에 시대착오적인 혹은 본인의 착오적인 잣대가 드리워 졌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일까.
박찬욱이 대단한 이유는 그러한 잣대에서 자유로운 노력을 하고, 영화를 만들어 두고 관객에게 이야기할 통로를 마련하는 시도를 하기 때문이다. 앞뒤가 막힌 완결적인 구도에서 선과 악과 원인과 결과가 선명하게 드러나는 순간 그것은 영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눈과 귀로 경험하는 모든 것이 머리속에서 다시금 조합될 때 새로운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박찬욱은 그런 시도에 대해 아주 관대하게 풍부한 텍스트를 만들어준다. 흡사,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생에게 훈계하기 보다는 조용히 가방에 생각할 거리가 있는 책을 넣어주듯이 말이다. 나는 박쥐에 대한 섣부른 인터넷상의 우려들만큼은 다시한 번 더 생각했으면 한다. 이렇게 쉽게 이야기될 영화 혹은 쉽게 이야기할만한 감독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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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쥐(Thirst)

 이 영화의 영어제목 "Thirst"가 원제에 더 가까운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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